Sustainability는 흔히 경제적 발전, 환경적 발전, 사회적 발전의 세 가지 축으로 설명한다. 이 단어의 어원은 환경적 관점에 있기 때문에 환경적 발전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더불어 환경문제는 단순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이슈가 아니라 인류사회의 시스템적 관점에서 볼 때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회적 이슈가 된다. 환경문제와 사회문제를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근시안적인 시각이다. 더불어 환경과 사회적 문제는 평등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요약하면 시계열적 관점(time series)에서 평등문제는 환경문제가 되고 횡단면적(cross section)으로 보면 평등문제는 사회문제가 된다.
이 세 가지 발전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강지속가능성의 입장에서 보면, 환경적 발전이나 사회적 발전을 위해서 경제적 발전을 저해하면 안된다고 한다. 즉 이 개념은 환경적 혹은 사회적 발전의 수준을 양으로 측정할 수 있다면 그 양이 경제적 발전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수준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은 측정의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다. 파이 크기가 정해져 있고 그 정해진 파이 크기에서 경제, 환경, 사회적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제로 섬 원리로서 나뉘어질 수 없고 오로지 파이 크기가 커질 때만 그 분할 비율이 바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경제적 발전을 저해할 수 없다는 개념이 모호하다. sustainability란 개념이 시작된 것은 오로지 경제적 성장만을 추구하다가 발생하게 된 환경, 사회적 문제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그 노력이 잘못된 것이고 그 노력(즉, 노력의 기회비용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을 이제는 환경적, 사회적 발전에도 나눠서 써야 하는 것이다.환경, 사회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균형된 발전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기존에 추진해 온 경제적 발전의 수준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경제적 발전을 저해할 수 없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를 통한 가이드라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언어적 문제가 아니라면 이러한 모호성 때문에 sustainability 혹은 sustainable development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게 되고 그 해법을 공유하는데도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마이클 포터는 기업의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성과가 동시에 달성할 수 있고 기업의 리더는 사회영향을 줄이기 위한 사업화(경제적 이익이 가능한)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CSV(Creating Shared Value)에 이어 MSV(Measuring Shared Value)까지 수 년간 이와 같은 주장을 견지해 왔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 왔다. 물론 이 논거는 설득력있고 현재 기업들에게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Sustainable development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가 무엇인가?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이라고 정의되어 있으나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세대가 스스로 필요가 충족되었다고 인식하는 수준이고, 현세대가 현재 시점에서 인식하고 있는 ‘미래세대의 충족 수준’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계없이 오로지 미래세대가 인식하는 수준이다. 우리가 과연 현재 시점에서 미래세대의 충족(만족)하는 수준을 알 수 있을까? 아니면 반대로 우리가 지금 예측하고 있는 미래세대의 충족 수준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능하고 또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앞으로 꾸준히 '충족되었다고 인식하는 수준'을 낮출 수 있다면 Sustainable development을 달성하기는 좀 더 수월해진다는 점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상대적으로 현 세대가 필요충족 되는 정도는 분명하므로 여러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충족 욕구를 지금보다 떨어뜨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약 10년 전부터 배출물질에 대한 환경규제는 '총량규제'방식으로 바뀌어 왔다. 수질, 대기질에 대해 부피단위 당 유해물질 농도를 기준으로 규제수준을 정하던 것에서 부터 예를 들면, 수도권이면 수도권 전체의 대기 유해물질 총량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비율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농도란 효율성과 유사한 개념이다. 비율은 자칫하면 사실 왜곡을 낳을 수 있다. 비율이 낮아(혹은 높아)진다고 현실적인 상황이 개선된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경우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윤리나 규범적인 면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 이를테면 빈곤계층이 전체 국민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든다고 사회가 살기 좋아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인구가 증가하는 상황에서는 비율이 줄어도 빈곤계층의 절대 숫자는 늘어날 수 있으며, 복지에 대한 정부정책의 본질적 목표는 빈곤계층 수를 줄이는 것에 있지, (빈곤계층이 늘어나도) 비율을 줄이는 것에 만족하는데 있지 않다. 어찌보면 투입대비 산출효과라는 효율성의 추구는 정당성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 수도권의 공기질 개선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오염물질의 절대량을 제한하는 것(총량규제)에 있지, 유해물질 별 배출농도를 조정하는 것에 있지 않다. 농도기준을 준수한다는 이유로 수도권에 계속 공장을 짓도록 내버려 두면 서울의 가을 하늘은 잿빛 하늘이 될테니까 말이다. 자동차 배기가스 농도기준 강화정책이 반드시 길거리의 대기질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정당성이 우선되려면 총량규제가 정답이다.
이같은 논의가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업을 못하는 경우가 생기니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말한 바대로 이미 이와 같은 논의와 정책적 추진은 대세가 되었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미래세대의 충족욕구 정도를 생각해 보자. 인간의 존엄성에 훼손이 생기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만족 수준을 낮출 필요가 있다. 인식이 변해야 한다. 사실 지금의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인류역사를 통틀어 최근 100여 년간의 일일 뿐이다. 대량생산은 대량소비를 낳는다. 배출물에 대한 총량규제처럼 '생산물에 대한 총량규제'가 필요하다. 대량생산을 넘어선 과잉생산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소비를 강요한다. 어쩌면 슘페터가 말하는 사회주의가 여기서 생각해 보는 지속가능한 사회일 수 있다. 적정량의 생산 속에서 갖게 되는 요구충족은 우리가 원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매우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
그래서 경영학에서 sustainability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마케팅은 무엇인가, sustainability를 고려할 때 기업윤리는 무엇인가, 기업의 지배구조, 조직과 전략은 어떻게 구축되어야 이러한 지향성을 갖고 발전할 수 있는가.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경제학, 사회학, 철학과 경영학의 통합적 접근이다. 학제적 구분에 따른 각자의 생각만으로 모든 해결을 보기는 불가능하다. 경영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여타 학문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본다. sustainable development는 인간의 관점에서 본 지속가능한 발전을 의미한다. 왜 지구환경의 보존(모든 환경, 생태적 이슈가 포함된다.)과 환경문제의 해소가 필요한지 생각해 보면 그 답은 명백하다. 우리가 논의하는 모든 것들은 인류가 존재할 때 의미를 갖는다. 바꿔 표현하면 지구환경이 훼손되어도 인류가 충족감을 느끼고 살기에 어려움이 없다면, 어려움을 해결하고 살 수 있다면 지금 정의되고 주장되는 지속가능발전의 모습은 매우 달라질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 때문에 가치의 분배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올바른 사회적 발전이 필요한 것인데, 만일 장기적으로 인류의 보편적 인식기준이 변한다면 지금의 사회적 책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주장이 나타날 것이다. 정리해 보면 '현재 인류가 인식하는 올바른 상태'를 추구하면서 인류가 소멸하지 않도록 발전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궁극적 지향점이 된다.
sustainability는 경영학에서 다루기에 너무 어려운 개념인 것 같지만 어떻게 하면 sustainability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의 방향성은 어느 정도 정리한 것 같다. 이 생각 저생각하면서, 이런 저런 경험을 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sustainability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정리라도 열심히 해 봐야겠다.
- 사실, 공상과학영화에서 나오듯이 지구가 멸망하고 몇몇의 인간이 뛰어난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외계 행성이나 우주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이야기 …… . 지속가능성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또는 지구는 그 탄생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존재해 왔다. 비록 그때 그때의 지구환경에서의 지배자가 바뀔 뿐이었다. 인류는 그 중에 하나이다. 현존하는 지배자.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뭔가 다른 접근방식이 이뤄져야 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인류의 지배기간을 늘리려고 하는 것이고 영원히 지배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속가능성인가.
- sustainability는 (브룬트란트 보고서에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상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다. 영원한 것은 좋은 것인가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 '죽어야 사는 여자'라는 영화를 통해 영생에 대한 환상을 깼던 사람이라면 언제까지 지속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물을 하고 싶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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